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그리고 UN 소총회 결의

2008년 법원직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땐 문제 퀄리티는 그닥 좋지 않지만, 질문을 주신 분께서도 왜? 4번이 정답이냐?

삼천만은 48년 2월 10일이고 UN 결의는 48년 2월 26일인데, 문제에서 말한 배경이 아니지 않느냐?


네 맞습니다.

전후 흐름을 잘 알고 계셔야 됩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정리하면,

1947.08.02 - 미국(로베트 국무장관), UN 관리하에 남북한 총선거 하자. → 소련, 거부

1947.08.12 - 결국 2차 미소 결렬

1947.09.17 - 미국(마셜 국무장관), 한국 독립 문제 UN 이관

1947.09.21, 09.23 - 미국,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 및 정부 수립 후 철수 제출.

1947.09.23 - 미국, 한국 독립 문제 UN 2차 총회 상정(본회의 채택) → 소련, 왜 한국 독립 문제를 UN까지 끌고 가냐?
(ps. UN은 1945년 10월 24일에 창설됨, 우리나라는 1949년부터 지속적으로 UN가입을 위해 노력을 했으나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이르러서야 남북한 동시에 UN가입을 함.)

1947.09.26 - 소련, 미국 의견 반대 한국 스스로 해결. 즉 반대 결의안 제출. 한국 독립 문제가 UN 총회에서 논의 되는 건 미소공동위원회 위반임.

1947.10.17 - 미국, 그럼 UN임시한국위원단(UNTCOK) 설립하자.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선거도 하고.

1947.10.21 - 소련 철수, 2차 미소 해체

1947.11.14 - UN 정치위원회 투표로 결정(미국 건의안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 동시 선거 등" 가결, 찬성 41 반대 0 기권 4)

1. 인구비례에 따른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실시

2. 제헌의회의 구성과 이들에 의 한 국회 구성과 헌법 제정, UN 임시위원단(UNTCOK) 설치

3. 점령 국들과 90일 이내에 철군 문제를 협의

1948.01.09 - UN 임시위원단(UNTCOK) 8개국 남한에 입국(소련은 UN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 거절, 이미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상당수가 좌경화가 되었기에 소련은 특별한 제스처를 쓸 필요가 없었음.)

1948.01.12 - UN 임시위원단, 총선거 준비 첫 회의

1948.02.06 - UN 임시위원단, 남북한 전체 선거를 원했으나, 소련의 입북 거절로 난관에 부딪힘, 그래서 임시위원단은 UN 총회 정치위원회 자문 결과, 여러 해결책 중(미국이 제시한 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선택) → 소련 및 여러나라 반대, 하지만 02.26일 투표로 가결됨.

대중일보 1948년 2월 6일자
→ 소총회 소집의 요청은 / 남조선 선거 실시 의미
대표 과반수 남조선 선거 지지 / 금후 전체회의에서 결정

한성일보 1948년 2월 7일자
→ 南北協商案提示(남북간현안제시)
→ 小總會에 代表派遣確實視 濠代表自由雰圍氣强調
小總會(소총회)에 代表派遣確實視(대표파견확실시) 濠代表自由雰圍氣强調(호대표자유분국기강조)

중앙신문 1948년 2월 8일자
→ 單獨政府樹立안코, 急速總選擧를 實施, 朝委에 對한 UN小總會措置豫想
單獨政府樹立(단독정부수립)안코, 急速總選擧(급속총선거)를 實施(실시), 朝委(조위)에 對(대)한 UN小總會措置豫想(소총회조치)


등등

당시 대부분의 신문들은 UN소총회에서 남한 단독 선거가 확실하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그리고 2월 10일 김구 선생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연설했고요.

기사 내용은 국립중앙도서관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www.nl.go.kr/newspaper/index.do

1948.02.10 - 김구, (이승만+한국 민주당이 원하는 남한 단독 선거가 유력시 되자) 반대 및 남북회담 제의 연설인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

1948.02.11, 12, 13 - 김구, "삼천만~~"을 서울신문에서 전문 기재 및 보도 (3일 동안)

1948.02.12 -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 요점만 기재 및 보도 (동아일보는 보도 X)

1948.02.26 - UN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안' 투표 실시 (찬성 31, 반대 2, 기권 11, 가결)
→ 기권 11표 : 공산 진영 국가
→ UN 소총회 : 늦어도 5월 10일까지는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
→ 미군정청 :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


1948.04.03 - 제주 4.3 사건 발발

1948.04.15 - 김구, 경교장에서 간단한 연설 후 북으로 출발(한국 독립당 찬성, 서북청년단 엄청난 반대)

1948.04.29 - 남북 연석회의 개최

1948.05.10 - 총선거 실시

1948.05.25 - 임시위원단, 선거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의안 채택(찬성 4, 반대 2, 기권 2로 채택)


Ps.

흔히 미소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라고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미소 중 유일한 성과가 있습니다. 예비 회담이긴 하지만요. 막둥이 계리직 준비할 때도 제가 말했던 내용입니다. 사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 · 소 공동 위원회 예비 회담에서 "남 · 북간 우편물 교환업무"를 합의했었고, 유일한 성과로 보고 있습니다.

출처: 6.25(한국전쟁) 당시 우편 제도는 어땠을까? [지우개닷컴]


2019 우정서기보(계리) 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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